장예린의 그림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한다. 처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어두운
내면에 집중했었다. 작고 검게 표현된 소녀는 불완전한 존재로서 인간의 유약함과 무력함을 고스란히
드러냈다. 그것은 두려움의 원형이었다.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가면을 쓰기 시작했다. 화려하게
치장하고 정면을 응시한 소녀는 가상인 듯 눈부신 모습이지만, 사회와 소통하고 싶은 자기 욕망의
소산이라는 면에서 작가 내면의 진실성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. 그리고 이제 장예린은
그 둘 사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인물을 그리기 시작했다.
소녀와 어른의 경계에 선 그녀. 아름다운 가면을 쓰고도 내 안에 존재하는 깊고 좁은 우물 속 그림자는
소멸되지 않음을, 타협일지언정 가면도 자신의 일부임을 이제 알아간다. 생명과 죽음, 진실과 거짓, 빛과
어둠이 늘 함께 있는 것처럼. 가면과 그림자는 서로를 마주하기 시작했다. 비밀스런 오브제와 의문의
배경 속에서 아름다움이 신비롭게 빛난다. 그리고 모호함은 풍부한 상상을 낳는다. 그녀는 대립항들의
상호작용을 통해 성숙한 의식의 개체로 나아간다. 칼 융(Carl Gustav Jung)이 말했던 모든 대립물이
하나의 존재 속에 결합된 신이자 경외로운 존재인 아브라삭스(Abraxas)를 향해.